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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책에서 가장 소름 돋았던 부문은 바로 시였다. 시는 참 안 읽게 되는데 '제20회 대산대학문학상-시' 중 이지은 학생의 시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. 2000년생 대학생이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? 요즘 임윤찬 피아니스트가 만 18세의 나이로 전 세계를 놀래키더니 글의 영역에서도 하늘이 점지해준 천재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.
계육공장, 닭들은 춤을 추고 방 안에 있는 내가 문득 낯설고 기이할 때면 레깅스를 골라 입고 강변을 달립니다 무릎을 스치는 질긴 나일론의 입김 잘근잘근 씹어도 끊어지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오늘도 내 허벅지 위에서 몇 개의 동물이 멸종했군요 괜찮습니다, 우는 건 돈이 들지 않으니까요 (중략) 나도 닭들도 레일 위에서 발을 구릅니다 원은 신이 점지한 도형 우리는 같이 동그라미 되어 세상을 돌고 세상이 돌고 방 안에서만 잠자코 있어도 여전히 배는 고픈데 나는 나일론을 입고 강변을 달립니다 그들은 텐더가 되고 어쨌든 나는 산책로를 달리는 사람으로 남고 (중략)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세상은 나를 속이는 것 같고 나는 내가 가여워지고 생각해보면 닭과 눈 마주쳐본 적 없는데 나는 레깅스를 입고 강변을 달립니다 폴짝폴짝 뛰어다닙니다 |
운동용 레깅스를 두고 노출이냐 아니냐만 따질 줄 알았지 나일론 옷 하나 만드느라 멸종해 갔을 동물들을 떠올리기나 했었나?
지구의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닭들이 가여운 건 알겠지만 나는 당장 레깅스를 입고 강변을 달려야겠고, 더 심각하게 생각하기는 싫어 폴짝폴짝 뛰어다닌다는 역설적인 발랄함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.
천재는 자기가 좋아하는 혹은 가치 있다 여기는 분야를 미친듯이 파고 드는 것 같다. 산에 들어가 피아노만 치고싶다는 임윤찬군처럼 다른 무엇에도 관심이 없고 그걸 안 하면 못견딜 정도가 되어야 이런 글도 쓰는가 보다.
결국 한 분야를 정했으면 그 근원을 우직하게 좇아 인생 전부를 거는 순수함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눈물 흘리게 만드는 것 아닐까. 나이 마흔 중반을 넘기고도 여전히 천재를 동경하는 자신을 보며.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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